칠레농업 현지조사를 다녀와서

탁 명 구 한농연 정책실장

비행기로만 꼬박 28시간을 날아간 끝에 칠레 산티아고시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3월 31일 새벽 7시경이었다. 며칠전 이곳에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비가 내렸다는 사실을 우연히 듣고 절대적으로 부족한 강수량으로 어떻게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먼저 물이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은 조사 일정이 시작되면서 금방 풀렸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칠레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안데스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생성된 영양분이 풍부한 빙하수를 관계수로를 이용하여 연중으로 인근 과수농장에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수농장이 집중된 칠레 중부지역의 경우 일교차가 심하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는 천혜의 기후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 농장의 대다수는 안데스산맥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방문단이 찾아간 곳도 최대의 포도 생산지인 Aconcagua계곡의 San Felipes지역에 위치한 Rio Blanco농장이었다. 산티아고시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농장으로 향하면서 우리 일행이 본 것은 온통 녹색 물결로 출렁이는 과수농장이었다. 그 엄청한 면적과 규모에 기가 죽은 우리는 목적지인 Rio Blanco농장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칠레의 과수산업 실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포도 수출량에서 칠레내 3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 농장(기업)이 직영 재배하는 면적은 약 3,000여ha로 년간 600만 상자(8.2kg)를 수출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이 농장이 소유한 여러 농장 중의 하나로 약 200ha 규모에서 국내에도 수입되고 있는 레드글로브라는 품종의 포도를 막 수확을 하고 있었다. 농장에서 직접 따서 맛을 확인했던 일행 모두의 공통된 의견은 당도와 맛에서 국내 최고급 포도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농장을 뒤로 하고, 농장내에 위치한 가공공장에서 갓 수확된 포도가 예냉, 선별, 포장 등 여러단계를 거치면서 수출용 대형 컨테이너에 적재되는 과정 모두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농장 주인의 배웅을 받고 버스에 오른 우리들은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동안 세계 최고 수준의 칠레 과수산업 실태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받은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 농장처럼 칠레내 전체 농장 중에서 약 2%에 불과한 대규모 농장들이 칠레 전체 과수면적의 77% 정도나 차지하고 있으며, 자체 직영농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은 물론 인근의 중소규모 농장과 계약을 체결하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면서 생산․가공․수출 전 분야에 걸쳐 최고의 기술수준을 갖춘 일관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더욱 무서운 점은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이들 농장들이 소유한 농지 중에서 현재 과수를 재배하고 있는 농지면적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추가로 수출시장이 확보되면 언제든지 최단기일내에 재배면적 확대가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1973년 군사쿠데타 이후 급속도로 개방화된 칠레의 경우 이미 일반관세율 7%를 적용하고 있어 가능하면 더 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하는 것이 자국에게 유리하다. 인구 1,500만명에 불과하고, 1인당 소득이 4천불에 불과한 칠레 국민의 소비여력을 감안했을 때 더 이상의 시장 확대를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현지에서 만나본 상사주재원들의 반응이었다.

한편 이번 방문기간 중에 뜻밖에 우리는 칠레측 FTA 협상대표인 외무부 양자통상국장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잡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지난 2월말 LA에서 우리 정부가 제출한 협상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전 안에 비해 많이 진전은 되었으나 여전히 사과와 배의 양허 조건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하반기에 한국에서 협상이 다시 진행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에 대해 참가한 농민단체의 맏형격인 농단협의 김인식 사무총장은 전체 조사단을 대표하여 약 20분에 걸쳐 강경한 어조로 칠레 농업과 우리 농업의 차이점을 피력하고, 한․칠레 FTA에 대한 우리 농민들의 반대 입장을 전달하였다.

사실 그동안 칠레에서 느낀 점이지만 만나본 칠레의 농업관련 기관이나 수출관계자 모두 우리 농민들이 왜 한․칠레 FTA를 반대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들은 우리 농민들의 거센 반대와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는 관계로 연내 FTA 체결이 어렵지 않겠냐고 되묻기도 하였다. 우리 정부는 어떻게든 연내에 반드시 FTA를 체결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당초 양허안 수준에서 대폭적으로 양보하면서까지 협정 체결을 서두르고 있으나 이곳 현지에서 만나본 칠레 정부 관계자들은 한국 정부가 최근에 제출한 양허안이 칠레측의 요구안과 여전히 편차가 크다고 밝히며, 오히려 우리나라 보다는 현재 진행중인 EU나 미국과의 FTA 체결에 더욱 주력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짧은 기간의 칠레 방문이었지만 나름대로 칠레 과수산업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FTA에 대한 칠레측의 입장과 전략을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칠레와의 FTA는 국가간 통상 협정의 필요충분조건인 산업간 상호보완성이 결여된 채 충분한 사전 검토없이 졸속으로 시작된 것이며, 칠레는 국내 농업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농업경쟁력을 갖추고, 타산업에는 큰 이익을 제공할 수 없는 상호보완성이 결여된 협정 파트너라는 것이 이번 칠레에 갔다왔던 조사단 전체의 공통된 의견이었다.